Dr.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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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후 일을 시작했다. 종구는 카메라를 들고 차를 몰아, 유적의 이곳저곳을 촬영하러 갔다. 유적의 지형을 파악하려면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종구는 유독 카메라에 관심이 많다. 이것저것 기계를 잘 다루지만, 정작 본인 카메라는 아직 없다. 

 

나와 도원이는두번째 토층 높이에 맞게 말뚝을 박고 줄을 매었다. 위에서 아래로 파 내려가면서 혹시라도 두 번째 토층보다 더 깊게 제토(흙을 제거하는 작업) 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발굴 현장에서 삽과 호미가 필수다. 하지만 무턱대고 팔 수 없어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는 거보다 훨씬 힘들다. 

 

삽 끝으로 전해지는 돌부리, 나뭇가지 걸리는 감촉(?)을 구별해 내야 한다. 혹시라도 토기와 같은 유물이 걸리면 얼른 작업을 멈추고 유적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한삽 한삽 내지를 때마다 정신을 집중해야 해서 배로 힘들었다. 나는 1학년 때부터 발굴 현장을 누비며 많은 어르신들의 사사를 받았다.

 

발굴 현장에서 인부로 일하시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60~80대 이시다. 60대는 고참 축에도 못 끼어, 새로 오시면 '막내'라고 불리며 커피를 타고 잔심부름을 해야 하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진다. 어르신들은 농사로 단련된 말근육을 소유하고 계시며, 삽이건 호미던 한번 쥐시면 조자룡 창 놀리 듯 엄청난 테크닉을 구사하신다. 

 

지수는 잔뿌리를 뽑고 돌을 걸러내는 작업을 시켰다. 여리여리한 몸으로 얼마나 버틸까 걱정되었지만 의외로 깡다구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배구를 해서인지 팔로 하는 건 다 잘한다고 했다. 쉬는 시간에도 냉커피를 타다 나르며 한시도 쉬지 않았다. 어제 말 잘 듣겠다고 한 소리가 빈 말은 아니었나 보다. 

 

"누가 와요"

 

지수가 구릉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작업하는게 신기해서 누가 찾아왔나 보다. 발굴 현장에서 가끔 있는 일이다. 지나가다 차를 멈추고 그거 얼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찾아온 이는 꼬마 소녀였다. 한 5살 남짓 되었을까? 까만 피부에 큼직한 눈동자를 꿈쩍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해?"

 

꼬마녀석이 반말로 물었다.

 

"일해"

 

"뭐 찾는데?"

 

"옛날 사람들이 살던 집"

 

"하지마"

 

"왜?"

 

"죽어"

 

꼬마 소녀는 꽤나 살벌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죽는다니... 무슨...

 

"응. 알았어. 가."

 

 

 

꼬마 소녀가 떠나고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죽는다니 무슨 소리인지... 꼬마의 장난이라고 넘기려 했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던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수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로 보아 얼굴에 다 쓰여있나 보다.

 

하루 종일 첫 번째 토층을 반도 못 벗겨내었다. 보통은 포크레인으로 작업 후 사람이 투입되지만, 우리는 모두 직접 해야 했다. 오랜만에 삽질을 하니 어깨죽지가 뻐근했다. 지수가 다가와 말도 없이 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뿌리쳐도 요지부동이다. 종구와 도원이는 우리를 본채 만채하며 샤워장 갈 채비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인근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 맛은 기가 막혔다. 현장에서 일하는 내내 바닷가에 모여드는 피서객들을 보며 당장이라도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종구와 도원이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뭐라 뭐라 궁시렁 대더니 갑자기 바다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입수. 저럴 거면 샤워는 왜 했는지 모르겠다. 두 놈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물놀이를 했다. 겨우 맥주 한 캔에 취한 건 아닐 테고 하루 종일 어지간히 덥긴 했나 보다. 해수욕장이 6시에 마감이라 두 놈은 별로 놀지도 못하고 물밖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시원해 보였다.

 

다들 피곤했는지 텐트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지수는 책을 읽는가 싶더니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겨우 9시밖에 안된 시간인데 다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런데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그 꼬마 소녀의 얼굴이 맴돌았다.

 

불을 끄고 누으려 하는데, 누군가 불쑥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꼬마 소녀였다. 한 손에 나뭇가지를 든 채 나를 가리키며 노려보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왜인지 신음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이 밤중에 꼬마 혼자 여기까지 오다니, 그리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꼬마 소녀는 나뭇가지를 거두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주섬 주섬 슬리퍼를 신고 소녀를 따라 나섰다. 꼬마소녀는 구릉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거리를 두고 나도 바닥에 앉았다.

 

"하지마"

 

"너 누구니?"

 

"죽어"

 

"왜 죽는데?"

 

"하지마"

 

꼬마 소녀는 내가 아닌 바다를 바라본 채 살벌한 말을 다시 내뱉었다.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아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둔탁한 저음으로 말했다. 

 

 

"엄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지"

 

"난 내 가족과 집을 지킬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를 죽이면 다 멈출 수 있어"

 

"지금까지 그래 왔거든"

 

꼬마 소녀의 얼굴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런데도 왠지 더 묻고 싶어졌다. 이녀석이 갑자기 나타나 왜 이런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냥 정신이 이상한 소녀인지 아니면 무언갈 알고 있는지 종 잡을 수 없었다. 난 꼬마소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니?

 

"하지마"

 

"그럼 살아"

 

"내가 하고 있는 건 나쁜 짓이 아니야.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히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의 몸이 절벽 아래로 부웅 하고 날았다. 꼬마 소녀가 달려와 나를 안고 절벽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나와 꼬마 소녀는 그대로 바닷물 속으로 내동댕이 쳐졌고, 나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죽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정신을 잃으면서도 계속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변가였다. 어떻게 살았는지, 왜 안 죽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난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그 꼬마 소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길게 누운 채 바닷물과 부딪혀 온몸이 욱신거렸다. 물을 많이 먹었는지 쿨럭 쿨럭대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왜 안 죽었어?"

 

이번에는 웬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역시나 살벌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이내 몸을 일으키고, 뒷걸음질을 쳤다. 소녀는 느린 걸음으로 점점 다가왔다. 소녀의 오른손에는 반쯤 잘린 맥주병이 들려져 있었다. 

 

난 재빠르게 자세를 낮추고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소녀의 얼굴에 뿌리고, 다리를 걸어 넘어 뜨렸다. 소녀는 맥없이 쓰러졌고, 꽤나 아픈지 해변에 누워 바둥 거렸다. 난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달렸다. 소녀가 뒤에서 따라오는지 쳐다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만큼 너무 무서웠다.

 

"이 미친놈이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야?"

 

종구가 나를 보자마자 일갈했다. 친구들을 보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나는 텐트로 들어가 아이스박스를 걷어차고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녀석들 주변으로 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두 녀석과 지수는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확실히 난 미쳐있었다. 

 

밤 사이 일어난 일을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댔다. 종구와 도원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꼬마가 우리 현장에 왔었다고? 언제?"

 

"오후쯤..."

 

"뭔 소리야 하루 종일 우리끼리 있었는데, 너 혼자 뭘 본거야?"

 

종구와 도원이는 꼬마 소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긴 나와 꼬마 소녀가 대화를 나눌 때도 두 녀석은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오직 지수만이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을 뿐...

 

"네가 말했잖아. 누가 온다고"

 

"풀 헤치는 소리가 들려 누가 오는 줄 알았는데, 보진 못했어요"

 

"그리곤 선배가 혼자서 이상한 말을 하셨잖아요... 전 이어폰을 끼고 전화하시는 줄 알았어요"

 

이게 뭐지... 나 혼자만 듣고, 나 혼자만 보았단 소린가? 그럼 내가 미친 게 확실했다. 하지만 난 분명 소녀를 보았고, 절벽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불과 조금 전까지 다른 소녀와 사투를 벌이고 겨우 도망쳐 나왔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너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좀 이상했어"

 

"몽유병 아니냐?"

 

하긴 그럴 수 도 있다. 다들 못 봤는데, 내 눈에만 보였다면 확실히 내가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잠이 떨 깬 채로 여전히 환상과 싸웠을 수 도 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그동안 작은 기미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한 순간에 미칠 수 있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반나절만 쉬겠다고 말했다. 그리곤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한 식당으로 향했다. 종구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지수를 딸려 보냈다. 김치찌개에 소주를 시키고 말없이 들이켰다. 지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체 몇 사람이나 더 죽어야 끝이 날런지... 쯧쯧"

 

식당 밖에서 담소를 나누다 들어오신 주인아주머니였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니 어젯밤사이에 어린아이가 물에 빠져 죽고, 놀러 온 고등학생이 누구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몸이 성한 데가 없다네요"

 

"조금 전에 몇 사람이라고 하신 건 뭐죠?"

 

"불과 2~3년 사이에 5명도 더 죽었어요. 다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도 업고.. 에휴"

 

지수는 창백한 얼굴로 몸이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난 소주잔을 든 손이 벌벌 떨렸지만, 겨우겨우 술 한잔을 털어 넣을 수 있었다. 지수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고, 손으로 본인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무섭게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선배가 한건 가요?

 

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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