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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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한건 가요?"

 

지수는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물었다. 따지고 보면 사실이었다. 꼬마 소녀와 함께 절벽에 떨어진 것도 나였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를 상처 입힌 것도 나였다. 하지만 난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누구를 해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이 그저 이상한 상황에 맞딱들였을 뿐이다. 

 

"선배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네요"

 

지수는 눈꼬리가 살짝 쳐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죠. 선배도 그렇게 느끼잖아요."

 

"그 꼬마 녀석은 가족을 지키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나만 죽으면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이죠?"

 

"나도 몰라"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지수와 나는 다시 발굴 현장으로 돌아왔다.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지만, 전혀 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종구와 도원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제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름 반장(?)인데 두 놈한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난 살아있고, 난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 정신이 이상해 헛것을 본 거라면 별거 아닐 수 도 있다. 그래서 다시 현장에서 삽을 들고 땅을 파기로 했다. 종구와 도원이는 나를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첫 번째 토층을 모두 제거했다.

 

샤워를 하고 해변가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도원이와 종구는 하루 종일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라고 욕이라도 해줬으면 싶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만 정신 차리면 된다. 그럼 아무 문제없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텐트로 돌아와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일 있을 조사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이제 한 꺼풀만 더 벗겨내면 유적이 위치한 층을 조사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유물이나 혹시 모를 또 다른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삽이 아닌 호미로 조심스럽게 제토 작업을 해야 한다. 

 

 

도원이와 종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지수는 내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책을 읽었다. 보통 때 같으면 뭐 하는 거냐고 핀잔을 주었을 텐데, 그냥 두었다. 지수가 곁에 있는 게 더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너처럼 끈질긴 놈은 처음이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표현하기 어려운 한기가 내 몸을 감쌌다. 지수가 곁에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나만 들리는 목소리... 그 소리가 또 찾아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왜 나를 죽이려 하지?"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난 그런 지수를 본체만체했다. 

 

"말했지. 난 가족을 지키려 한다고..."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여긴 내 집이야"

 

난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 집이라니. 지금 우리가 발굴하고 있는 유적이 이 귀신 아니 정체 모를 이의 집이란 소리인가? 나도 이 녀석도 미친 게 분명하다. 아니, 내가 미쳐서 만든 환영인 게 분명하다. 난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섰다. 지수가 내 손을 꽉 쥐고 따라나섰다.

 

텐트 밖에는 아침에 만났던 여고생이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지수야, 술좀 가져다 줄래?"

 

 

지수는 말없이 소주와 맥주 그리고 잔을 챙겨 나왔다. 난 바닥에 잔을 깔고 소주를 채웠다. 지수는 여전히 내 옆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왠지 지수의 손을 잡고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물론 지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곁을 지키고 있다.

 

"네 집이라니, 무슨 말이지?"

 

"내  아이들과 아이의 아빠가 살았던 곳이야"

 

"이 유적은 수천 년도 더 된 곳이야"

 

"그런 건 몰라. 난 가족을 지킬 뿐이야"

 

이 여고생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가족이 생기면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저 흙 안에 너의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는 거잖아"

 

"그래"

 

"난 네 집안에 가득 찬 흙을 걷어 낼거야. 그럼 네 가족들이 있겠지. 보고싶지 않니?"

 

그 여고생은 고개를 숙이며 수심에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 하지만 내 집에 손대는 놈들을 모두 죽여왔어. 너도 그렇게 될 거고"

 

"가족과 집을 지키려면, 그들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잖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어"

 

난 이 여고생과 앉아 대화를 거듭할수록 기분이 차분해져 갔다. 뭔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었고, 지수가 묵묵히 내 술잔을 채우며 여전히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지수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마디 말도 없었다. 나는 이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믿기 힘들지만, 이 주거지는 이 여고생의 집이고, 집 안에는 가족이 있다. 그래서 이 여고생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집에 손대는 사람을 죽여왔고, 나 역시 그렇게 할 생각이다. 그런데 왜 나지? 종구와 도원이 그리고 지수도 있는데 왜 유독 나에게만 모습을 나태내고 죽이려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나지?"

 

"너만 죽이면 다른 놈들은 알아서 사라질 거야."

 

"넌 너의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 알고 있어. 내 가족은 이미... 그래서 건드리지 말라는 거야. 그들이 잠들게 내버려 두라고"

 

"그런데 너는 왜 죽지 않았지?"

 

"죽을 수가 없어. 나도 몰라"

 

여고생은 내 물음에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 눈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뭔가 말도 안 되지만, 이 여고생은 가족의 엄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 앞에 나타나 조사를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나만 죽이면 다른 사람들은 겁먹고 도망갈게 뻔하니 고집스레 나만 노리고 있는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는 고사라는 걸 지낸다. 특히 무덤을 발굴하기 전에는 더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고 절을 하며 망자의 넋을 달랜다. 가끔씩 들리는 이야기로 어떤 발굴 현장의 누가 죽었다더라, 무덤 주인이 노해서 화를 입었다느니 하는 공포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전해지곤 한다. 지금 내가 그 경험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네 이름은 뭐니?"

 

 

"이름? 그게 뭔데. 난 엄마야"

 

"이름이 없어?"

 

"태어나서는 엄마, 아빠의 딸이었고, 아이를 낳고는 엄마가 되었어. 그게 나야"

 

내 질문이 신선했는지, 여고생은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대답했다. 

 

"넌 어떻게 엄마가 되었지? 결혼한 거야?"

 

"난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서 엄마, 아빠와 살았어.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게 되었지. 그렇게  가족이 생겼고, 이 집에 살았어"

 

"네 아이의 아빠는 어떤 사람이지?"

 

"약해 빠졌지. 나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했어. 그래도 내 아이의 아빠야"

 

남편에 대해 물었더니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도 가족을 지키려 했어"

 

"무엇으로부터?"

 

"이방인"

 

"우리 집 주변으로 집 몇 채가 더 있었어. 멀리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우린 같이 짐승을 잡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 겨울이면 끼니를 못 때울 때도 더러 있었지만, 서로 도와가며 그럭저럭 잘 살았어. 그 이방인들이 오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었지. 우리는 낮은 산에 살았고, 그들은 산 밑에 자리를 잡았어. 처음에는 한 두 가족이 옮겨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숫자가 불어났어. 그들은 짐승을 잡거나 조개를 캐기보다는 씨앗을 뿌리는데 열중했지. 그래서 우리는 짐승을 넘겨주고 쌀이란 걸 받았지"

 

이 여자가 말하고 있는 건 청동기시대 사람들이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전환을 설명하는 많은 학자가 있지만, 뚜렷한 증거를 대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몇 해 전 한 젊은 고고학자가 그 전환을 설명하는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석기시대에는 전쟁과 같은 다툼은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넓은 지역을 소수의 사람들이 공유하기 때문에 영역을 두고 싸우기보다는 협력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하지만 농경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토지의 면적, 그것도 농사가 가능한 지역을 차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다른 마을을 공격하거나 포로를 잡아 노예로 삼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보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 신석기시대의 화살촉, 돌도끼 등은 사냥과 벌목을 위한 게 대부분인데, 청동기시대에는 동검을 비롯해 각종 살상용 무기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너의 가족을 죽인 거야?"

 

"내 아이의 아빠는 맹렬히 저항했지. 작고 약한 사람이었지만,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이들을 보호했지. 하지만 그 이방인들은 아주 간단히 아이 아빠의 팔을 잘라 내었어. 난 둔탁한 무언가로 목덜미를 맞았고, 그대로 누워서 아이 아빠가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지. 이방인들은 내 아이들을 아빠와 함께 산채로 묻었어"

 

"넌 어디에 있었지?"

 

"몰라. 눈을 떠 보니 풀 숲에 누워있었지. 그리고 내 집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파봤지만 소용없었어. 그 후 여기에 앉아 근처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몰아냈지, 처음에는 겁만 줘도 도망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겁만으로는 효과가 없더군. 그래서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지.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

 

이제 이 여자가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이해가 갔다. 물론 내 눈에만 보이고 들린다는 사실은 여전히 섬뜩하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로서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니, 어느 엄마가 마다할 수 있을까? 난 이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생겼다. 

 

"아이의 아빠와 아이들이 편하게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게 어때? 언제까지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을 죽일 순 없잖아?"

 

"어떻게?"

 

"너의 집을 내가 다시 찾아줄게. 그리고 아이들과 아빠를 편히 잠들 수 있게 장례를 치러줄게"

 

"장례가 뭔데?"

 

"죽은 사람이 편히 잠들 수 있게 기원하는 거지"

 

"그럼 그들이 편해질까?"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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