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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익 교수 프로필

 

김영익 교수의 나이는 1959년 4월 18일 생이다(월간중앙 인터뷰에서는 1958년생이라 밝힌 바 있다.) 전라남도 함평군이 고향이다. 학력은 전남대학교 경제학 학사, 서강대학교 경제학 석사·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또 옥스퍼드대학교 그린 템플턴 컬리지 최고위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를 맡고 있다.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마을의 훈장이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었다. 김영익의 아버지는 동생들을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보내느라 전답을 팔고 빚을 냈다. 가족이 먹고살기 어려운 형편이라 김영익은 진학을 포기했다.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지 못해 풀을 베다 말려 사용했을 정도였다. 하루는 풀을 베고 내려오는데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지나갔다. 어린 김영익은 교복이 너무 입고 싶었다. 그때 동네 형이 공부를 하자며 산남교회라는 곳으로 어린 김영익을 이끌었다.

 

당시 교회에서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책상도 없이 교회 마루 바닥에서 공부를 했고 교복도 직접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김영익이 다닌 교회는 정식 학교가 아니라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 검정고시 출신

 

어린 김영익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성적 경쟁을 했던 친구가 교회로 찾아와 자기네 학교와 축구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김영익은 교회숙소에서 합숙훈련을 하며 축구경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친구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비공식 학교와 축구 경기를 허용할 수 없다고 해 경기가 무산됐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김영익은 정식으로 중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고 다짐했다. 교과서를 외우다시피 해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따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함평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고, 2학년 여름방학 때 대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대입을 준비하며 고려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재수를 하며 서울대학교 입학을 노렸지만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누나가 취업을 해 김영익을 지원했지만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비싼 등록금의 사립대학교를 지원하는 건 사치라고 생각해 국립대학교에 응시했다. 그리고 전남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가난했던 김영익이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비단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스스로 가난을 내세울만한 남다른 불행이라 여기지 않는다. 다만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하며 살았다. 

 

22살에 전남대학교 경제학과 입학했다. 졸업 후 서강대학교 석사과정을 마쳤고 29살에 군대를 다녀왔다. 군대를 다녀온 후 대신경제연구소에 입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검정고시로 배움을 이어갔지만, 김영익은 검정고시 출신임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로 불리지만 김영익은 검정고시 출신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임원이 되기 전 업계 최고의 증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적이 있다. 하지만 면접 담당자가 김영익이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이력서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김영익은 요구를 거부했고 면접을 보지 않았다. 검정고시는 김영익이 스스로 얻은 첫 번째 자격이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

 

증권맨으로 입사한 김영익은 매일 6시에 출근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을 해 미국 주식시장 결과와 해외에서 발표된 경제 지표를 정리해 펀드매니저와 고객들에게 발송했다. 주 5일 근무였지만 토요일에도 출근해 주식시장을 정리하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회사를 다니며 대학원을 졸업했다. 회사에서 눈치를 줄만도 한데, 김영익은 남보다 배로 일했다. 누구보다 자료를 많이 냈고, 특히 학교에서 배운 것을 접목시켜 깊이있는 자료를 준비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했다. 대학원을 안 다니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해 회사에서도 눈감아 주었다.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이 즐비한 증권가에서 지방대 출신인 김영익은 차별도 받았다.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고의 위치까지 올랐다. 공부와 일에 몰두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딸에게 소올해 아직도 사이가 서먹하다.

 

애널리스트로 김영익은 노스트라다무스급 예언을 했다. 2000년 주가 하락, 9·11 테러 직전의 주가 폭락과 반등, 2004년 주가 하락 등 굵직한 변동을 모두 맞추며 최고의 경제 전문가로 올라섰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 매도를 주장했고, 테러 직후에는 주식을 매수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그리고 마법처럼 그의 주장이 맞아들었다. 2005년 코스피가 1379로 마감할 것을 가장 가깝게 예측했고, 2004~2006년 주가 변동도 정확히 맞췄다.

 

김영익을 추종(?)하는 투자자들이 생겼고, 그의 한마디에 돈이 움직였다. 때로는 예측이 틀리기도 하지만 겸양하는 자세로 공부하고 또 자료를 낸다. 유튜브가 활성화되면서 삼프로TV를 비롯한 각종 채널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남편 김영익, 아버지 김영익

 

경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김영익이지만 가족에게는 소홀했다. 새벽부터 출근해 공부하고 일하며 업적을 쌓았지만 가족과 집안일은 등한히 했다. 몇년 전 딸에게 팔짱을 껴보라 했는데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김영익의 아내 박현주 씨는 소통을 하기에 남편이 너무 바빴다며 때로는 야속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당시에는 누구나 바쁘게 일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밖에 없다며 남편을 두둔했다. 

 

어느 날 박현주 씨는 김영익에게 와인을 권하며 손 편지를 내밀었다. 바쁘게만 살지 말고 주말 농장을 가꾸며 여유로움을 즐기자는 내용이었다. 인천 강화도에 있는 조그만 시골집에 텃밭을 일구며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함께 텃밭을 가꾸니 대화도 많아지고 관계도 좋아졌다.

 

김영익은 나이를 먹으며 삶의 무게를 하나씩 줄이고자 한다. 집 크기를 줄이고 일도 줄이는 대신 본질에 충실하는 게 목표다. 몇 년 전 딸의 결혼식 때 가족과 함께 축가도 불렀다. 주말농장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골프 약속도 거의 잡지 않는다. 아이들과 대화하고 아버지, 남편으로 충실 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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