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6 - [생활의발견] - [고고학 소설] 타임 어태커(Time Attacker) 1
2020/08/17 - [생활의발견] - [고고학 소설] 타임 어태커(Time Attacker) 2
2020/09/01 - [생활의발견] - [고고학 소설] 타임 어태커(Time Attacker) 3
어영부영 기말고사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시험이 예상보다 1주일이나 일찍 끝나, 발굴조사까지 시간적 여유가 다소 있었다. 준비해야 할게 많아 머리가 아프면서도, 막상 내가 조사 현장을 맡을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민 교수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 지수 때문 일거다. 젠장.
"같이 해봐."
민 교수님은 거두절미하고 딱 한마디만 하셨다. 나는 "네" 라고 대답했고, 교수님은 전화를 끊으셨다. 이게 교수님과의 대화 전부였다. 지수녀석이 찾아간 게 분명하다. 재수 없는 녀석이지만 추진력 하나만큼은 높이 살만하다. 대부분 학생들이 교수님을 어려워하는데 지수 녀석이 교수님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그렇지...후문을 지나기도 전에 지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잔해요. 제가 살게요."
"싫어"
"어차피 같이 하기로 한거, 잘해보자는 의민데 왜 이러시나"
지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팔을 끌고 대학로로 향했다. 지수의 살갗이 닿아 잠시 움찔했다. 다행히 지수는 눈치 못 챈 거 같다. 그렇게 지수의 손에 이끌려 주점에 왔다. 과 사람들이 자주 찾는 주점으로 해물파전이 정말 맛있는 곳이다. 지수는 해물파전과 도토리묵 그리고 동동주 한 사발을 주문했다.
주변에 몇몇 낯이 익은 얼굴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지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마 과 사람들인거 같은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둘이 있으면 괜한 소문이 나서 성가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이제 대학도 한 학기만 남았을 뿐이다. 그냥 떠들라고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선배는 저 싫죠?"
"아니"
"그럼 저 괜찮아요?"
"아니"
"그럼 뭐에요?"
"아무 생각 없어."
지수 녀석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했다 이내 풀이 죽었다. 지난달 인문대 앞에서 거창한 프러포즈를 받았던 지수다. 남자는 정장을 차려입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친구들까지 대동해 멋들어진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지수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 콧대가 높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과 함께 있으니 주변에서 쳐다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지수는 예쁜 편이다. 아니 예쁘다. 몸매도 좋다. 남자라면 호감이 갈 외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 녀석의 성격을 모를 때나 드는 생각이고, 안다면 나처럼 진절머리를 칠게 분명하다. 특히나 예의 바른 척하면서 툭툭 쏘아대는 말투는 정말 재수가 너무 없다.
"선배는 왜 아빠처럼 굴어요?"
"아싸니까 아싸처럼 굴지."
"일부러 피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뭐"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지수는 입술을 삐죽였다. 마침 해물파전이 나왔고, 항상 그랬듯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주셨다. 케첩이 듬뿍 뿌려진 계란말이로 이걸 먹으면 속이 든든해져 술이 술술 들어간다. 지수는 잔에 동동주를 담아내고 내게 건넸다. 나는 말없이 잔을 들고 호로록 마시고, 해물파전을 입에 넣었다.
지수는 동동주에 정신이 알딸딸해졌는지 몽롱한 얼굴을 하고 연신 떠들어댔다. 고고학 연구방법이 어떻고, 연대 결정법이 어떻고 하면서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읊어대듯 말했다. 술에 취한 것 같지만, 간간히 내 표정을 살피는 걸로 봐서 취하진 않은 거 같다. 다만 나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눈친데 나는 말없이 술만 마셨다.
괜히 대화를 시작했다가 이 밤의 끝을 잡고 밤을 새우는 수가 있다. 종구가 한번 상대해 줬다고 들었다. 지수 녀석이 워낙 열정적이라 밤이 새도록 고고학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놓아주질 않았다고 했다. 그 후론 종구 녀석도 지수를 슬슬 피해 다닌다. 하지만 종구는 지수만 한 학생이 없다고 했다. 신입생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말할 정도니 공부를 엄청 했을 거라고 했다.
지수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 날 따라다니는 거다. 공부했던 내용을 깊이 있게 토론할 상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고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졸업한 후에도 전공을 살리는 건 한 해 1~2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수의 동급생들이 같이 말을 섞을 수준이 안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신석기시대 토기에서 문양의 변화로 획기를 정하고 연대를 부여하는 건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문양의 변화가 연대 변화를 담보한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내 대답에 지수는 당황한 듯했다. 몽롱했던 얼굴을 풀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문양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패션과 같아요."
"요즘에도 시대에 따라 패션이 변하 듯 당시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양이 변한 건 당연해요."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데? 문양의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과 시간이 흘러서 문양이 변한 것, 어느 게 먼저지?"
"선배의 얼굴을 한번 보세요. 어릴 때는 탱글탱글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 검고 거친 피부로 변했잖아요."
"아마 나이를 더 먹으면 주름이 생기고, 피부의 생기도 줄어들게 분명해요. 이건 당연한 이치예요."
지수 녀석 은근히 내 검은 얼굴을 이용해 돌려 까기를 시전 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논리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의 형태는 물론 피부 색깔과 주름이 느는 건 당연하다. 이 변화로 시간의 변화를 파악하는 게 어찌 보면 논리적인 연대 결정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빈은 마흔을 넘은 나이에도 옥 같은 피부를 유지하는데?"
"그건 예외적인 경우고요.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늙기 마련이죠."
"그 늙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지?"
"사람이 늙어가는 속도는 저마다 다르지 않아? 원빈처럼 동안인 경우도 있고"
"제 말은 경향성을 말하는 거예요. 간혹 특이 케이스가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 너의 말도 일리는 있다고 치자. 사람의 늙음이란 자연스러운 거니까."
"하지만 토기 문양을 시문 하는 건 개인인데, 이걸 어떻게 시간의 흐름과 동일시한다는 거지?"
"빗금을 3번 그으면 오래된 토기고, 2번 그으면 덜 오래된 토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니?"
"시문 방법의 전수가 문양의 유사함을 가져왔다고 가정해도, 전국적에서 출토하는 토기의 문양이 모두 동일한 시간 폭을 갖고 변화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나의 융단 폭격과 같은 질문에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지수의 논리는 고고학에서 정론(正論)이다. 확실히 지수는 열심히 공부한 티가 났다. 나 역시 토기 문양이 시간성을 갖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문양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그 기능이 무언지도 모른 채 문양의 차이로 연대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다.
실제로 현재까지도 고고학자들은 신석기시대 토기 문양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그저 문양이 다르고 시문하는 방식이 다르니 서로 다른 시간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문양의 차이가 시간성을 나타낸다고 해도, 첫 번째로 설명해야 할 것은 문양의 의미와 기능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명쾌하게 대답하는 고고학자는 아무도 없다. 나 역시 그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지수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곤 이내 표정을 활짝 피고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난 벌레라도 닿은 듯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지수는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해벌쭉 웃으며 헤헤하는 소리까지 내었다. 얘가 취했나?
"역시 선배는 달라요."
"선배처럼 생각하는 고고학자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선배일 줄은 몰랐어요."
난 괜한 얘기를 한 거 같아 후회했다. 지수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꺼냈다. 또 고고학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건 실수였다. 이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인 지수는 정론을 공부하면 된다. 그 후 여러 학설을 접하는 게 좋은데,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
나는 신입생부터 고고학 정론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논문을 삐뚤게 보는 나쁜 버릇이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주류 학설로 많은 고고학적 정황이 설명되고 있다. 물론 설명하지 못하는 게 더 많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기존 학설을 반박하지만, 그들도 뚜렷한 대안을 갖고 있지는 않다.
난 다시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웬일인지 지수 녀석이 조용해졌다. 내 손목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지만 별 다른 말 없이 지수 역시 술만 마셨다. 확실히 지수는 그동안 봐왔던 다른 학생들과는 달랐다. 열정이 넘친다. 무엇보다 머리가 좋다. 책을 외워 읊어대는 게 아닌 모두 이해하고 소화한 것이다. 그러니 시도 때도 없이 술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배는 대학원 가실 거죠?"
사실 유학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문제다.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일본 유학을 꿈꿨다. 일본어를 간간히 공부하고 있지만 대학원을 가려면 말하고, 읽고, 쓰기가 가능해야 한다. 아직 그 정도 단계에 오지는 못 했다. 유학을 간다면 언어연수도 받아야 해서 비용과 시간 모두 많이 든다. 그래서 포기 아닌 포기한 상태다.
민 교수님께 대학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 그런데 교수님이 반대하셨다. 오지 말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눈이 똥그래지고 말문이 막혔다. 난 민 교수님의 전공을 쫓고 싶다. 민 교수님은 신석기시대 연구의 대가다. 학계에서도 알아주는 학자다. 그런 분 밑에서 공부할 수 있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내가 대학원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신다.
교수님은 다른 학교를 추천해 주셨다. 본인 후배가 재직하는 곳으로, 유학 후 돌아와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나도 존경하는 교수님이다. 고고학 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는 등 학계에서는 말썽꾸러기로 통할 정도로 악명이 높다. 학회에서 연로하신 학자들을 논파하는 걸 서슴지 않는 분이다. 어떻게 보면 통쾌한 느낌이 들 정도다.
민 교수님은 후배분께 전화를 넣어주신다고 했다. 그리곤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면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아마 내가 싫어 내치는 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종구, 도원이와 함께 공부하고 싶었다. 두 친구는 이미 마음을 굳혔고, 교수님과도 어느정도 얘기가 된 듯 했다. 그런데 나에겐 다른 학교를 권유해주셨다. 내가 교수님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셨는지도 모른다.
"선배 제 말 들려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지수의 물음에 대답을 못 했다. 지수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마도.."
"선배가 대학원에 가시면 앞으로 더 볼 수 있겠네요."
"그러게"
지수와 가까워진 느낌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이 느낌을 가장 경계했다. 난 아싸 기질이 있는지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게 좀 불편하다. 그저 아는 사람 몇 명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친구도 별로 없고, 아는 사람이라곤 연구소 선배들 정도다. 후배들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주점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려는데, 사장님은 지수를 가리키며 이미 계산을 했다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신입생에게 얻어먹는 건 좀 그랬다. 지수는 봤냐?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지수는 계속 내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몇 번 뿌리치려고 흔들어도 놓아주지 않는다. 왜 잡냐고 물어보면 이상한 말을 할까 봐 그냥 두기로 했다.
"한 잔 더할래?"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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