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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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어태커(Time Attacker) 1

Ⅰ 스스로를 무기력한 남자라 생각했다. 나이를 먹어도 변한 게 없었고, 의지는 물론 행동력도 없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나를 평범하다고 말한다. 평범하다는 게 별다를 게 없다는 의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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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게 더 낫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새로운 물을 찾아 다시 병을 채워야 한다. 엎질러진 물을 보고 신세한탄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그게 내가 믿어왔고, 앞으로도 믿을 내 삶의 방식이다."

 

잘려나간 둔덕에서 내가 찾은건 유구였다. 유구는 집터, 무덤, 수혈 등 유적 안에 존재하는 개별단위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곳에 얼마나 많은 유구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미 대부분 포크레인에 의해 잘려나간 후라 문화재 발굴을 한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유구가 남아 있는 둔덕은 대충보니 가로세로 약 3m 정도였다. 갈색층은 약 50cm의 두께로 쌓여 있었다. 난 화가 났다. 공사를 하기 전 제대로 조사만 했어도 이 유구가 이렇게 파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발굴조사 역시 유적을 파괴하는 행위지만, 실측을 하고 사진을 찍고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유구도 그런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난 핸드폰을 꺼내 사진 몇장 남겨두었다. 그리고 인근 마을로 찾아가 몇몇 어르신을 만났다. 말씀을 들어보니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공원부지였는데, 예산이 부족해 공사가 지지부진하다고 했다. 지자체에서 진행 한 사업이 예산이 부족해 중단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전에 유적이 있는지 조사하지 않았을까? 아니 조사를 했음에도 발견되지 않은 걸까?

 

시청에 가서 담당 공무원을 만나 따지고 싶었지만,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유구가 이미 파괴된 지금에 와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유구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흥분했지만 다시 평정심을 찾고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난 하숙집이 아닌 도원이 방으로 향했다. 이미 종구도 와있었다. 어제부터 치킨 먹자고 노래를 부르던 도원이는 내가 오자 반가움을 온 얼굴로 표현했다. 유독 여드름이 많은 친군데 얼굴을 일그러 뜨리니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시켜먹던 치킨을 주문하고 소주와 맥주를 까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난 조심스레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역시나 종구와 도원이는 별거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야 그렇게 날라가는 유적은 수도 없이 많아."

 

"뭐 한다고 돈 들여서 거길  또 다녀오냐. 너도 참 할 일 없어? 심심해?."

 

물론 종구와 도원이의 말이 틀린 게 없지만,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친구들이 괜히 야속했다. 괜스레 얘길 꺼내서 본전도 못 찾았다. 어차피 이럴 줄 알고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화제를 돌려 취업 얘기나 하다 하숙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유물 실측 수업이 있었다. 난 책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이렇게 손 쓰는 데는 재주가 없다. 특히 그림실력은 엉망이라 실측하는 게 너무 싫다. 그래도 실측을 못하면 나중에 취업도 어렵고, 고고학자라고 불리기도 뭣하니 어쩔 수 없이 하긴 하는데 내 적성에 정말 안 맞는다. 난 어제 가방에 넣어둔 토기 조각을 꺼내 실측을 시작했다.

 

"그건 못 보던 토기인데 어디서 났나?"

 

"아, 얼마 전 바닷가에서 주었습니다"

 

교수님은 내 실습 유물에 관심을 보이셨고, 주변 친구들이 나에게 주목하는지도 모르고, 교수님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상황을 설명 드렸다. 그걸 지켜보던 종구와 도원이는 실실 웃어댔다. 이놈들은 내가 교수님 앞에서 괜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하긴 아닌 것도 아니지...

 

교수님은 내 설명을 들으시더니, 수업이 끝난 후 교수실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난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다. 지난 4년간 화내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으시던 교수님이지만 내 설명에 굳은 얼굴을 하시곤 자리를 뜨셨다. 난 실측 연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교수님의 굳은 얼굴 탓인지 긴장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두 친구 놈들에게 같이 가자 부탁했다. 왠지 불호령을 내리실 것 같아 무서웠다. 친구 놈들은 흔쾌히 나를 따라나섰다. 교수님은 우리 셋을 앉혀놓고 내가 주어 온 토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딘가 전화를 걸어 한참을 통화하셨다.

 

"내가 후배에게 일러두었으니 곧 조치를 취할 거야."

 

교수님은 문화재청에서 일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해당 지자체와 연락해 문화재 조사 여부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파악할 거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괜한 일을 벌였나 싶었다. 이러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 나 때문에 해당 공무원이 잘리지 않을지 괜스레 걱정이 앞섰다.

 

교수님은 나에게 알아낸 게 더 없냐고 물어오셨고, 난 찍어둔 사진을 보여드렸다. 교수님은 단번에 집자리 유구라며, 붉고 단단한 흙이 위치한 곳은 집자리 내부에서 불을 피우던 공간일 것이라고 하셨다. 사진만 보고도 이걸 파악하시다니, 현장에 다녀온 내가 다 머쓱해졌다.

 

 

그리곤 토기 조각은 교수님이 보관했다가 후배분을 통해 박물관으로 인계하겠다고 하셨다. 당연한 조치였지만 왠지 토기 조각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박물관으로 인계되기 전까지만 제가 보관하면 안 되겠냐 사정했다. 교수님은 내 행동에 어이가 없으셨는지 실소를 하시며, 원래는 안되는데 조심해서 다루라며 허락해 주셨다.

 

난 홀로 실습실에 돌아와 실측을 시작했다. 선이 삐쭉빼쭉했지만 내가 담을 수 있는 정보를 이 도면에 다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학교 연구소에서 카메라를 빌려와 사진을 찍었다. 또 토기 조각을 이리저리 살피고 만져보며 내가 파악한 내용을 글로 적어나갔다.

 

가로 7.8cm, 세로 5.5cm. 두께 1.2~0.8cm.

토기의 저부(低部)로 추정되나 저면(低面)은 남아있지 않다. 저면으로 갈수록 좁아드는 형태로, 저부는 첨저(尖低)로 추정된다. 하단부로 갈수록 두께가 두꺼워지며, 그을음이 남아 있다. 내면에는 지두흔(指頭痕)이 남아 있고, 상단부에 갈색띠가 형성되어 있다. 태토에는 굵은 석립과 모래가 섞여 있다. 색조는 내·외면 모두 적갈색을 띠며, 외면 하단부에 남아있는 그을음은 흑갈색을 띤다. 

 

학교 연구소에서 실습하며 배웠던 유물 기술 방법을 토대로, 토기 조각의 내용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발견 위치, 내용, 사진 등을 정리하여 적어두었던 유물 기술과 합쳐 하나의 파일로 만들었다. 작업을 끝내고 나니 밤 12시가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난 실습실을 나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학교 호숫가로 향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손이 떨려왔고, 차가운 맥주를 마시니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핸드폰을 켜보니 도원이와 종구에게 전화와 카톡이 잔뜩 와있었다. 토기 조각과 씨름하느라 전화가 온지도 몰랐나 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종구에게 전화를 거니 도원이와 같이 있다고 했다. 난 두 친구 놈을 만나러 그들이 있는 바(Bar)로 향했다.

 

"너 요즘 왜 그래?" "아버님 돌아가시고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괜찮냐?"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뭔 말을 그렇게 해"

 

"그건 아니지만 안 그러던 놈이 그러니까 걱정 돼서 그렇지."

 

"고고학 공부하는 놈이 유물을 찾았고, 또 그걸 교수님에게 알려 조치를 했으니 잘한 거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파괴되는 유적이 한 두 개냐고, 왜 네가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어."

 

종구는 나를 다그치듯 몰아세웠고, 도원이는 술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사실 종구의 말이 맞다. 토기 조각은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파괴되는 유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 하나를 내가 찾아 실상을 밝힌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종구는 나의 잘못을 탓하는게 아니라, 내가 않하던 짓을하니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오랜만에 바카디 한잔을 주문해 목구멍에 털어놓고 담배만 피워댔다. 어차피 끝난 일이다. 유구는 이미 파괴되었고, 문화재청에서 조사를 한다고 해도 달라질게 없었다. 파괴된 유구가 다시 원상 복구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또 담당 공무원은 문책을 당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종구의 말이 맞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보다. 마치 정의의 사도인 양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덮어두면 될 일을 끄집어 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물론 이럴 의도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버렸다.

 

며칠 후 교수님은 나를 호출하셨고, 나는 두 친구 놈과 다시 교수실을 찾았다. 교수님 후배가 조사한 결과, 공사 전 문화재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기존에 발간된 문화재 분포지도 조사에서 유물이나 유구가 발견되지 않은 지역이었고, 면적도 크지 않아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로 인해 유물과 유구가 발견되었고, 문화재 조사를 하지 않은 지자체에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유구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조사한다고 해도 건질게 거의 없을 것이다. 또 담당 공무원은 정직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다 종구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교수님은 우리에게 제안을 하나 해 오셨다.

 

"너희 셋이 발굴조사를 해보면 어떠냐?"

 

"뭐 큰 유적도 아니고 다 날라가서 남아있는 게 없겠지만 연습 삼아해 봐."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서 누구도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닫고 있었다. 아니 다 파괴된 유구를 조사해서 무엇을 하시려고... 발굴조사를 하려면 최소 며칠을 걸릴 것이고, 결정적으로 우리 셋은 아직 졸업도 못한 학부생에 불과하다. 그런 우리끼리 문화재 발굴조사라니 말도 안 된다.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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