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Penguin

반응형

그 여자는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모습을 바뀐다. 어린아이였다가 여고생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나는 문뜩 그녀의 본모습이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여고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진짜인지도 묻고 싶었다. 내 제안에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 여자는 내 눈초리가 느껴졌는지,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 모습은 네가 아니지? 네 진짜 모습은 어디 있어?"

 

"알고 싶은 게 많은 녀석이군"

 

"너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들었어. 그 학생도 죽일 거니?"

 

"내가 죽여왔던 사람들은 내 공간을 침범한 녀석들이야. 지금 이 모습은 단지 너에게만 보일 뿐이고"

 

"무슨 말이야 그게..."

 

"죽이고 싶은 사람 몸속에 들어가 죽게 만들었다는 소리지. 이해가 안 되니?"

 

"그럼 진짜 너는 어디 있는데?"

 

나는 이제 그녀가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자신의 공간에 넘어오는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자살하게 만들어, 여태껏 그녀의 집을 지켜 온 것이다. 그럼 내가 처음 만났던 그 여자아이도 그녀의 공간에 침범했던 것일까? 그래서 죽인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더 물었다간 그녀의 화만 돋우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학생을 놓아줘"

 

"내가 왜?"

 

"그 학생은 아무 잘못이 없어"

 

"이 여자도 내 공간으로 넘어왔어. 그러니 죽어 마땅해"

 

"그 학생을 죽인다면, 네 집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릴 거야"

 

내 협박이 통했는지 그녀는 움찔했다. 그리고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기 전에 네가 먼저 죽을 거야"

 

"괜히 힘 빼지 말고, 그 학생을 놓아줘.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그녀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옆을 보니 지수가 내 손을 잡고 우리의 대화를 집중하며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고, 그녀가 떠난 후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난 가만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처음이야. 나와 대화를 한 녀석은..."

 

그녀가 돌아와 말했다.

 

"그 학생은?"

 

"해변에다 던져놓고 왔지. 걱정 마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본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범한 30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1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고, 약간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동그랗고 코는 약간 납작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나타난 그녀에게 왜 나에게만 모습이 보이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이상 요구(?)를 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까 다음에 묻기로 했다. 그 여고생을 놔준 것을 보면 내 제안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먼저 네 집안에 가득한 흙을 거둬낼 거야. 그리고 네가 사용했던 물건을 수습하고, 네 가족들을 찾을 거야"

 

"그리고?"

 

"장례를 치러줄 거야"

 

"그게 뭔데?"

 

"죽은 사람들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땅 속에 고이 묻어주는 거지. 네가 그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표식도 세워줄게"

 

"그럼 그들이 편해질까?"

 

사실 장례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때로는 죽은 망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든 죽은 사람을 위해 번쩍번쩍한 묘비를 세우고, 관리를 잘해준다고 해서 실제로 편히 잠드는 건 아니다. 

 

난 종교가 없어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종교가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게,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이 앞으로 닥칠 죽음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제안한 장례도 그녀를 위한 것이지, 실제 그녀의 가족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장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실제 신석기시대에도 장례가 이루어졌다. 토기 안에 사람을 묻거나 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장례가 행해진 건 청동기시대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는 장례가 막 시작하던 시기였다. 

 

"물론이지. 내 아버지도 그렇게 잠드셨고, 내 할아버지도 그랬고..."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왜 내 집을 파 해치려 하는 거지?"

 

"난 네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물론 네가 대답해 준다면 더욱 좋고."

 

그녀는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별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그리곤 다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난 지수의 손을 이끌고 텐트로 들어와 다시 술을 들이켰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말짱했다.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지금은 반반이에요"

 

"저 두 놈들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을 거고, 믿게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그러니 그냥 난 믿어줘"

 

지수는 내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첫 번째 토층을 거둬냈으니, 이제는 유적이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해야 했다. 우리는 삽 대신 호미를 들고 조심스레 바닥을 긁어 나가기 시작했다. 3명이 일렬로 꾸부정하게 앉아 같은 방향으로 바닥을 긁어나갔다. 긁는 속도를 맞추기 위해 옆 사람을 계속 주시하면서 말이다.

 

종구와 도원 그리고 지수가 바닥을 긁고 난 서서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지수가 왜 선배는 가만히 서있냐 물었다. 그러자 종구가 내 대신 설명을 해주었다. 앉아 있으면 시야가 좁아져 유적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서서 이리저리 다니며 유적의 흔적을 찾는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유적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흙의 색깔과 첨가물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유심히 봐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인부 어르신들이 바닥을 긁고 조사원들이 유적의 흔적을 찾아낸다. 여기서는 그나마 내가 경험이 가장 많으니, 내가 담당하는 게 맞다. 종구와 도원이도 그걸 알고 말없이 내 지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땅을 긁었지만 유적은커녕 토기 조각 하나 찾지 못했다. 아직 주거지가 있는 토층에 다 다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래도 새로운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발굴 현장에서 유구끼리 중복되어 확인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두 번째 토층 제토도 끝날 거야. 그러면 주거지를 찾을 수 있겠지"

 

"주거지를 찾으면 어떻게 하죠?"

 

"트라울로 선을 긋고 페인트를 칠할 거야. 그리고 종구가 사진을 찍을 거고"

 

"그리고 십자 모양의 둑을 남기고 하나씩 파내려 가면 되긴 하는데, 조사방법에 대해서는 교수님과 문 선생님을 모시고 자세히 논의한 후 결정할 거야."

 

우리는 조사 방법에 대해 간단히 논의한 후 잠이 들었다. 웬일인지 오늘은 그녀가 찾아오지 않았다. 매일 찾아와 괴롭히더니 오늘은 잠잠하다. 아마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게 뻔하다. 아직까지는 주거지가 형체를 드러나지 않았으니 아마 궁금한 것도 없으리라.

 

난 잠들기 전 조사일지를 작성해 두었다. 매일 써야 하는 조사일지인데, 그동안 험한 일(?)을 겪느라 적지 못했다. 난 조사일지를 2개로 나누어 적었다. 첫 번째는 평범한 조사일지다. 조사방법, 내용, 기타 등등 사실 그대로의 조사과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적어 두었다.

 

두 번째 조사일지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험한 일을 추가해 적었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누군가 본다면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게 뻔하지만, 그래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지수는 또 말없이 책을 읽다 잠들었다. 요 말 많던 녀석이 요새 잠잠하다.

 

믿어 달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로 그날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도 말하지도 않은 지수다.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녀석이다. 몇 시간 동안 혼자 술을 마시며 미친 사람처럼 떠들던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내 손을 꼭 잡고 말이다. 내가 걱정되서 인지, 아니면 신기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번에 지수를 다시 보게 되었다. 

 

다음날 두 번째 토층을 거의 제거했다. 그리고 세 번째 토층에 다 달아 다시 조심스레 제토 작업을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유구가 나올 차례다. 난 녀석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정신을 차리고 유구를 찾아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러니 나에게 한말이나 다름없다.

 

땡볕에 바닥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도원이가 물조리개로 바닥에 물을 뿌려댔다. 발굴 현장 알바를 해서 그런지 종구와 도원이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한다. 바닥이 마르면 유구를 눈으로 찾기 어렵다. 그래서 물을 뿌려 색깔 차이가 확연하게 나게 만드는 것도 발굴 현장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렇게 한 꺼풀 흙을 거둬내자 무언가 내 눈에 들어왔다. 주변 흙은 밝은 회색을 띠고 있는데, 어두운 갈색 흙이 군데군데 보였다. 밝은 회색 흙을 보통 생토라고 한다. 생토는 한 번도 파내어지지 않은 흙을 말한다. 이 흙을 파내면 안에 공기가 들어가 산화되고 부식되어 색깔이 변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신석기인들이 집을 만들기 위해 생토층을 파내려 간다. 이후 집이 쓸모를 다하고 폐기가 되면 파내어진 공간으로 새로운 흙이 들어가게 된다. 이때 공기는 물론 식물, 돌, 모래 등 다양한 첨가물이 섞이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집 내부가 무너지거나 다른 흙으로 채워지게 되면, 집 내부와 외부가 확연하게 다른 색깔의 흙으로 구분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원리로 고고학자가 유적을 찾아낸다. 

 

하지만 실제로는 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경험 많은 고고학자야 쉽게 유적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아직 대학도 졸업 못한 풋내기인 나는 두 눈을 부릎뜨고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 생토와 확연히 다른 어두운 갈색 흙을 찾아내었다. 

 

"유구다. 다들 멈춰봐"

 

10편에 계속

반응형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