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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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우리는 연구소 앞에서 만났다. 다들 어디서 났는지 등산복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왔다. 나도 한동안 묵혀 두었던 현장복을 꺼내 입었다. 처음 발굴 현장에서 일할 때는 어머니가 사주신 검은색 츄리닝을 입고 갔다. 일하기 편한 복장으로 입고 오라고 해서 츄리닝을 입었는데, 다들 약수터 가냐고 놀려댔다. 

 

그 후론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그리고 조끼를 걸쳐 입었다. 면바지는 흙이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아, 좀 불편해도 청바지를 입었다. 매년 방학을 이용해 발굴 현장을 다니니, 이제는 등산복이 제일 편하다. 때도 잘 않타고 움직이기도 편하다. 게다가 방수도 되니, 현장에서 등산복만 한 게 없다. 

 

문 선생님을 비롯해 연구소 직원 몇명도 우리와 같이 갈 채비를 했다. 조사 첫날이니 함께 가서 현장을 둘러보고 조사방법을 논의하기로 했다. 연구소 차를 종구가 운전하고 도원이가 앞자리에 앉았다. 난 뒷자리에 앉았는데, 피곤한지 지수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민 교수님도 언제 오셨는지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시 관계자들도 나와있었다. 한분 한분 소개가 끝난 후 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내가 직접 구릉으로 안내했다. 가면서 유적을 발견하게 된 경위, 현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렸다. 시 관계자 분들은 본인들의 실수로 일어나 일이라 별 질문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유적이 있는 구릉 정상부에 도착했다. 날씨가 가물어서 그런지 토층 단면이 말라있었다. 민 교수님은 도원이가 짊어지고 온 생수 몇병을 뿌려 흙을 적셨다. 그러니 토층의 색깔이 선명해졌고, 유구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였다. 교수님과 문 선생님이 확인하셨으니 유구임에 틀림없다.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무와 풀을 제거하고 제토 작업부터 해야겠네요"

 

문 선생님은 둔덕의 정상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당연하겠지만 문화재 발굴은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조사를 한다. 그러니 둔덕 정상부에 자라난 나무와 풀을 제거하고, 흙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나가며 유구를 찾아야 한다. 크지는 않았지만 굵기가 허벅지만 한 소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뿌리를 뽑아내면 유구가 훼손 될 수도 있으니, 놔두는 게 좋겠네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셨다. 괜히 나무뿌리를 뽑으려다 유구가 날아가는 수가 있다. 그러니 성가시더라도 잔뿌리 하나하나 세심하게 제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무를 베어내고 흙을 벗겨내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이 보였다.

 

 

문 선생님은 트롤(발굴현장에서 사용하는 호미와 비슷한 도구)을 이용해 잘려나간 둔덕 단면에 선을 그으셨다. 흔히 '토층을 잡는다'라고 하는데, 흙이 어떻게 쌓였는지 파악하는 작업이다. 흙의 색깔, 첨가물, 질감 등을 고려해서 선을 긋는데, 경험이 많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문 선생님은 크게 5개의 토층선을 그으셨다. 그리곤 위에서 두번째 선을 가리키시며,

 

"여기까지 제토(흙을 제거하는 작업)하면 되겠네"

 

민 교수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와중에 내가 줄자를 이용해 둔덕의 크기를 실측했다. 가로 3.5m, 세로 3.2m였고, 바닥으로부터 높이는 1.2m였다. 좁디좁은 내 자취방 만한 크기였고, 남자 3명이 겨우 누울까 말까 했다. 6월의 초여름 날씨라 그런지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앞으로 더위는 더 심해질 텐데, 다들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두 번째 토층까지 제토하는데 얼마면 되겠나?"

 

민 교수님이 물어오셨다. 

 

"4일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왜 4일이지?"

 

"오늘은 짐을 옮기고, 탠트를 쳐야 합니다. 그리고 조사방법에 대해서 논의할 시간도 필요하고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나무제거 및 제토하는데 3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 최대한 세심하게 조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3일후에 오지"

 

 

교수님과 연구소 직원들이 돌아갔고, 현장에는 우리 4명만 남겨졌다. 일단 짐부터 옮기기로 했다. 도원이가 근처 마을에서 리어카를 빌려와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있는 대로 짊을 쌓아 올리고 내가 앞에서 끌고 두 놈이 뒤에서 밀었다. 그동안 지수는 텐트를 설치할 장소에 있는 풀을 뽑고, 큰 돌을 치웠다. 

 

경사가 가파르진 않았지만 날씨가 더워 그런지 장정 3명이서 끌어도 무겁긴 무거웠다. 도착해서 물 한모금 마시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벌써 해가 중천이라 빨리 텐트 설치를 마무리해야 한다. 도원이가 캠핑 경험이 많아 그런지 작업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텐트가 완성되었고, 종구와 도원이가 함께 텐트를 쓰고, 나와 지수가 조리용 텐트에서 지내기로 했다. 

 

리어카를 반납하고 점심식사를 할겸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지수가 쪼르르 달려와 리어카에 몸을 실었다. 도원이와 종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어카를 끌고 냅다 구릉을 아래로 달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지수는 소리를 질러댔고, 난 놈들이 부끄러워 저만치 거리를 두고 터벅터벅 걸어내려 갔다. 우리는 해수욕장 근처에서 약간 떨어진 한 마을의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일전에 혼자 왔을 때 내가 봐 둔 식당이다. 

 

여느 시골 식당처럼 찌개류를 팔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주문했고, 난 소주도 시켰다.

 

"뭐야 너 술먹게?"

 

"아직 해가 중천인데 뭔 벌써 술이야"

 

종구와 도원이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말없이 잔에 술을 채워 한잔씩 넘겨주었다.

 

"사실 너희들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잘해보고 싶다. 이 말이 하고 싶었어"

 

"뭐래"

 

"우리가 같은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아마 힘들겠지. 졸업하면 다들 취업해서 뿔뿔이 흩어질 텐데,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그러니 잘해보자"

 

나는 잔을 들어 올렸고, 다들 말없이 잔을 부딪히고 소주를 털어 넣었다. 술이 달았다. 보통은 쓰다. 가끔씩 술이 달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술이 달면 그 날은 달리는 날이다. 잔을 또 채우려는데 지수가 소주병을 낚아채고는 술을 따라주었다. 

 

"말 잘 들을게요"

 

지수의 말에 다들 껄껄대며 웃었다. 특히 종구는 니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 지 입으로 말을 잘 듣겠다고 하니 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나올 수가 없었다. 

 

"알아요, 이 자리에 제가 불청객 같은 사람이란 걸"

 

"그래도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전 맨날 혼자니까"

 

지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뭐지, 벌써 취한 건 아닐 거고 얘가 왜 이러나 싶다. 

 

"입학하고 제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비웃어요. 수업시간에 질문하면 왜 그러 말을 하냐는 듯 노려보는 사람도 있고..."

 

 "고고학을 공부하러 왔고, 고고학 관련 질문을 하는데 왜 비웃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저를 이상한 애 취급하고, 그래서 선배들을 더 귀찮게 한 것도 있고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맺힌 게 많았는지 지수가 폭포수처럼 말문을 열었다. 사실 나도 같은 이유로 입을 닫고 살았다. 고고학을 공부하러 왔지만, 졸업 후 전공을 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성적에나 관심이 있지, 실제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1학년 때 지수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연구소에서 선배들을 만났고 지금은 종구와 도원이가 같이 공부를 하고 있다. 두 놈은 분명 졸업 후에도 고고학을 할 녀석들이다. 왜냐하면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고, 지난 4년 동안 배운 거라곤 고고학이 전부인 놈들이다. 

 

 

지수 역시 나와 같은 외로움을 느꼈을 테고, 돈독해 보이는 우리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더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녔을 거다. 옆에서 맞장구 쳐주는 친구가 있고 없고는 정말 차이가 크다. 혼자 외롭게 공부하는 것보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 게 더 도움이 된다. 지수는 그런 친구가 절실하다. 

 

"우연히 과 사무실에서 선배 레포트를 봤어요"

 

"고고학 연구방법에 관한 레포트였는데, 조교 선생님이 없는 틈에 복사해서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죄송해요"

 

"그게 뭐"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난 또 뭐 별거라고, 레포트야 한 학기에도 몇 개씩 써서 내는 건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다. 

 

"처음 읽고 난 후 전 선배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책에 나와있는 내용과 다 반대로 쓰셨잖아요"

 

"그런데 밤새 읽고 또 읽으니 그제야 이해가 좀 되더라고요. 그때 딱 알았어요"

 

"선배는 달라요"

 

 

 

식당을 나서자 머리가 알딸딸 했다. 4명이서 소주 7병을 비워냈으니 취하지 않을리 없다. 30도가 넘는 날씨라 무척 더웠다. 지금이라도 눈 앞에 있는 바다에 들어가고 싶었다. 종구는 한잔 더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제 겨우 오후 4시였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술을 산 후 텐트로 향했다. 조리용 텐트는 군용 막사처럼 내부가 넓었다. 

 

도원이 놈이 아이스박스에서 두툼한 고기를 꺼냈다. 다들 눈이 돌아가서 쳐다보니,

 

"이거 토마호크야"

 

"도끼라고?"

 

"멍청한 놈, 양고기 몰라? 토마호크 스테이크 몰라?"

 

도원이는 종구의 물음에 적잖은 핀잔을 주며 포장을 벗겨냈다. 그리곤 캠핑용 버너에 불을 피우고 후라이팬을 얹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내부가 넓어 4명이 둘러앉아 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테이블도 널찍해 술과 야채 그리고 김치를 꺼내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노릇하게 익은 양고기가 접시에 올려졌고, 도원이는 나이프로 능숙하게 뼈에서 살점을 발라내었다. 젓가락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는데 그 맛이 장난이 아니었다. 짭짤한 소금과 육즙이 풍부하게 어우러져 정말 맛있었다. 다들 같은 맛을 느꼈는지 눈이 동그래졌고, 도원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뼈에 남은 살점을 뜯었다. 

 

맛은 있었는데 양은 얼마 되지 않아 아쉬웠다. 우리는 아쉬움을 술로 달래며 조사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두 번째 토층을 벗겨내기까지 작업은 노가다와 다름없다. 보통은 발굴 현장에서 인부 어르신들이 하시는 일이다. 주로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 땅을 잘 파신다. 대개 인부 어르신들은 팀을 만들어서 봉고차를 타고 움직이신다. 숙련되신 분들은 몇십년을 발굴현장에서 일하신 분들도 있다. 

 

"나와 도원이가 나무를 맡을게, 지수는 풀이나 뽑아. 잔돌도 버리고"

 

"종구는 주변 지형을 파악할 수 있게 사진을 찍어, 끝나면 합류하고"

 

"작업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쉬는 시간은 30분씩 오전 10시와 오후 3시.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야."

 

발굴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지는 스케줄이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발굴 현장을 답사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일하는 건 처음이다. 그래도 별 말없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오후 7시가 넘어가니 해가 뉘엿뉘엿 사라져 어두워졌다. 조명을 켜 두어 내부는 밝았지만 벌레가 꼬였다. 그래도 모기가 없어 다행이다. 요즘 모기를 보기 힘들다. 파리도.

 

종구와 도원이는 본인들 텐트로 돌아갔고,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졌다. 나도 일찍 자려 침대를 정리하는데 지수가 다가왔다. 

 

"선배 화장실 가요"

 

"가"

 

"같이 가요"

 

꽤 오래 참았는지 다리를 꼬아대며 말했다. 하긴 그렇게 마셔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우리는 틈틈이 근처에서 용무(?)를 해결했지만 지수는 자리를 파할 때까지 기다렸나 보다. 어두워졌는데 혼자 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화장실 가는 걸로 눈치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랜턴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뭐"

 

"제가 선배 레포트 몰래 본거요"

 

"그거 인터넷에 올려서 다운도 받을 수 있는데?"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거라고요?"

 

"내가 올렸다고, 남들이 다운 받으면 내가 돈 버는 거고, 몰라?"

 

지수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 대신 표정으로 말했다. 텐트에서 해수욕장에 위치한 화장실까지 15분 정도 걸렸다. 다행히 화장실은 24시간 개방되어 있었지만, 샤워장은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한다. 그래서 작업이 끝나는 5시가 되면 바로 내려와야 겨우 샤워를 할 수 있다. 

 

나는 화장실에서 멀리 떨어진 그네벤치에 앉아 지수를 기다렸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저녁은 선선했다. 해연에는 놀러 온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는가 하면, 돗자리를 깔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MT 온 대학생들이 둘러앉아 술판을 벌이는데, 술병이 수십 개나 놔뒹구는거 보니 꽤나 오래 마신 듯했다. 하긴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 MT를 이곳 대천해수욕장에서 보냈다. 

 

 

언제 왔는지 지수는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곤 맥주 한 캔을 건네주었다. 지수는 술을 잘 마시는 것처럼 굴었지만, 실제로는 잔을 거의 비워내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은 말짱해 보였다. 그런데도 맥주를 건네는 거 보니 할 말이 더 남은 눈치다. 

 

"하고 싶은걸 해, 따라 할 필요 없어"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떨때는 정말 포기하고 싶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치"

 

"겨우 반년 하고 포기할 거면, 빠를수록 좋아.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해"

 

난 맥주 한 캔을 금세 비워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수와 텐트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바다가 코 앞이라 그런지 파도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사하는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싶다. 발굴 현장에서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인부 어르신들도 비가 내리면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만큼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지수는 반대편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옹알 옹알 거리는 거 보니 이어폰을 끼고 전화를 하는 눈치다. 그러고 보면 겨우 스무살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남자 셋이랑 시골 현장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내 딸이었으면 절대 안 보낼 텐데 하는 쓸 때 없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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