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무기력한 남자라 생각했다. 나이를 먹어도 변한 게 없었고, 의지는 물론 행동력도 없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나를 평범하다고 말한다. 평범하다는 게 별다를 게 없다는 의미보다, 아무런 장점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난 평범하다. 그리고 말이없다. 깡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 그런지 항상 손에서 매퀘한 냄새가 났다.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척 했다. 아니 술을 잘 마시는 척 했다. 그럼 남들이 나를 깔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항상 혼자 있으면서 혼자 있는걸 두려워 한다. 남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다. 하지만 남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저 나를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다가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시큰둥하게 그들을 대한다.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왠지 귀찮아질 것 같아 손사래를 치며 다가오는 그들을 막는다.
어렸을 적부터 역사책을 좋아했다. 양수리 동네서점에서 발견한 역사책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나갔다. 방과 후 도서관에 가는 게 내 일과였으며, 1주일에 꼬박꼬박 3권씩 읽었다. 그래서 항상 국사 점수는 잘 나왔다. 책 읽기 덕분인지 국어 점수도 좋았다.
대학교 입학 후 혼자 지내고 있다. 혼자 있는게 편하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만나면 잘 떠들어대고 술도 곧잘 마시지만, 혼자 있으면 잘 먹지도 않는다. 그래서 깡 마른 몸은 살이 붙을 줄 모른다. 예민해서 잠도 오래 못 잔다. 이래저래 불편한 게 많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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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방에 눌러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종구다. 나에게 전화를 거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다. 괜찮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어디 좀 가잖다. 아마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내가 힘들어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종구를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았다.
종구와 대천해수욕장에 왔다. 우리의 첫 MT 장소였다. 그리고 마지막 MT 장소기도 하다. 난 그 이후로 모임은 거의 나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종구와 바닷가에 앉아 술을 마셨다. 종구는 나에게 아버지 얘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과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벌리며 내 기분을 살폈다. 난 괜찮은데도 말이다.
이제 해가 질 시간이라 돌아가야 한다. 종구와 바닷가를 걸으며 또 잡소리를 나눴다. 그러다 내 눈에 왠 흙 뭉텅이가 들어왔다. 뭐지 하고 발코로 눌러봤는데 딱딱했다. 토기였다. 방학이면 발굴 현장 등 야외조사 현장을 누벼 토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는 나다. 그런데 여기 바닷가에서 토기를 찾다니 신기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바닷가는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물이 들어오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어떤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더라도 쉽게 휩쓸려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토기는 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나온게 아닐 것이다. 아마 어디 구릉에 위치한 집자리로 부터 휩쓸려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무려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이리저리 옮겨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그 토기가 나타난 것이다.
이놈은 운이 좋다. 너를 알아볼줄 아는 이에게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종구는 뭐냐고 내 손에 든 토기를 낚아챘다. 그리곤 토기 내면에 울룩불룩한 자욱을 보며 "이거 지두흔이네"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볼이 넓은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지문도 보였다.
토기를 만드는걸 성형이라고 하는데, 성형 시 점토의 점성을 높이고 점토끼리 잘 붙을 수 있게 손으로 눌러준다. 전문용어로 수날법이라고 하는데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손바닥만 한 작은 파편이었지만 과거로부터 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토기였다.
"야 이거 좀더 뒤져보면 토기 좀 나오겠는데?!"
"아니 이 주변에는 없을 거야."
기대하는 말투의 종구를 난 딱 잘라 아니라고 말했다. 여긴 바닷가다. 파도의 움직임 그리고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이곳에 유적이 위치했을 가능성은 적다. 있었다고 해도 야영지와 같은 점유기간이 짧은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런 유적들은 흔적을 잘 남기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난 방 한편에 토기를 놓아두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책상에 앉아 종종 토기를 바라보긴 했지만 별 감흥 없이 눈길을 주는 게 다였다. 이렇게 작은 토기 조각으로 뭘 알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내가 왜 고민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자꾸 눈길이 갔다. 특히 엄지손가락 자국에 남아 있는 지문을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즈를 보면 여자 혹은 아이 같았다. 수천 년 전 사람의 지문을 볼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 토기를 만든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이상을 생각도 했다.
토기란 자고로 무엇을 담는 기능을 한다. 곡물을 저장하던지, 온몸으로 불을 받아내 물을 끓이기도 한다. 요즘은 금속으로 만든 용기를 쓰지만, 당시에는 이 토기가 가장 값비싼 도구였을 것이다. 신기한 게 흙으로 만든 이 토기로 인해 인간은 불로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이 토기 조각에도 드문드문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그럼 가능성은 두 가지다. 조리에 사용되었던 토기 거나, 화재로 인한 그을음이 생겼을 수 도 있다. 토기 조각의 그을음은 두께가 두꺼운 부분에 몰려 있었고, 안쪽에는 갈색 띠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두께가 두꺼운 부분이 토기의 아래쪽일 것이고, 이 부분에 그을음이 몰려 있는 건 불이 직접적으로 닿았던 흔적일 것이다. 그리고 안쪽에 남아 있는 갈색 띠는 음식 조리 시 생겨난 것이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흔적을 하나 둘씩 찾아가자 나는 토기 조각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작은 토기조각이지만 참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흘려 들었던 내용이 이 토기 조각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유물 실측을 배우면서 여러 유물을 관찰했던 경험이 이 토기조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역시 공부해서 남주냐라는 말은 틀린게 아니었다. 난 이 토기조각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방안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무언가를 밝히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멍해진다. 이 책 저책 뒤져봐도 다 교과서적인 내용뿐이다. 실제로 토기의 용도와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증거는 많지 않다. 더구나 수천 년 전의 토기에서 그 증거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연대 범위를 크게 잡는다. 그리고 방사성탄소연대로 보정을 하지만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또 토기에 표현된 문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그 문양의 생김새와 새김 방법을 토대로 연대를 추정한다. 그런데 이 토기는 문양이 없나? 하고 보들보들한 휴지로 표면을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토기 표면에 붙어 있던 흙이 떨어져 나가더니 가느다란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양이 있었다. 난 흥분했다. 왜 흥분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울림이 들렸다. 마치 대단한 걸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훨씬 멀쩡한 토기는 박물관에 가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학교 연구소에 가도 쉽게 만질 수 있다. 그럼에도 난 이 작은 토기 조각 때문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난 보령 행 기차에 올랐다. 별 다른 계획은 없지만 무작정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종구에게 말할까 말까 밤새 고민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별거 아니라며 같이 가주지도 않을 녀석이다. 또 다른 친구 도원이 놈이 치킨 먹자며 전화를 해왔지만 가지 않았다. 때로는 치킨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난 지금 그걸 찾으러 간다.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해 다시 그곳을 찾았다. U자 형태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해안선의 끄트머리에 야트막한 구릉이 있었다. 건물이라도 들어설 예정인지 구릉의 여기저기에 포크레인의 난도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난 지퍼백에 토기 조각을 담아 배낭에 넣어두고 구릉으로 향했다.
구릉 높은 곳에 올라서니 제법 평평한 공간이 나왔다. 실제 수쳔년전에도 이렇게 평지였는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고 공사를 해서 이렇게 지형이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 구릉 이곳저곳을 돌며 바닥을 살폈다. 혹시 토기 조각이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한참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도자기 조각을 몇 개 찾았을 뿐 토기 조각과 유사한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이 도자기들도 여기 것이 아닌 공사를 위해 옮겨 온 흙에서 딸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개의 둔덕이 남아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바닥보다 1m 남짓 높았는데, 바닥 공사를 하기 전 실제 높이가 지금 둔덕의 높이와 같았으리라.
뾰족한 구릉의 정상부를 깎아내고, 외부에서 흙을 옮겨와 평탄화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구릉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몇몇 둔덕을 남겨 놓은 것이다. 나는 잘려나간 둔덕의 단면을 살폈다. 포크레인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잘려나간 나무뿌리들이 엉성하게 얽혀 있었다.
그렇게 둔덕 몇 개를 지나쳐 바다가 잘 보이는 둔덕 앞에 섰다. 그리고 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둔덕 단면은 밝은 색 흙으로 덮여있었는데, 그 안에 갈색의 얇은 층이 보였다. 그리고 갈색층 안에는 붉은색 점토가 드문드문 보였다. 다가가 만져보니 딱딱했다. 그렇다면 불에 구워져 딱딱해져 버린 흙일 것이다. 나는 목구멍에서 바보 같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내가 무언가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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